생일 – 이윤림

맛없는 인생을 차려놓은 식탁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윤림 시,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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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일기 – 이해인

1.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웃음
잃게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앉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
시원한 그늘 떠날 줄을 모릅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시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랑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2.

사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젊은 벗이여
나는 오늘
달고 맛있는
초록 수박 한 덩이
그대에게 보내며
시원한 여름을 가져봅니다

한창 진행중이라는
그대의 첫사랑도
이 수박처럼
물기 많고
싱싱하고
어떤 시련 중에도
모나지 않은 둥근 힘으로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기를
해 아래 웃으며 기도합니다

3.

바다가 그리운 여름날은
오이를 썰고
얼음을 띄워
미역 냉국을 해먹습니다

입 안에 가득 고여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하얀 파도소리에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해녀가 되어
시의 전복을 따러 갑니다

이해인 시, <여름 일기>

다시 사월

20170407

당인리 발전소 앞엔 벚꽃이 제법 피었다. 이번 주말 즈음이면 만개한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할 기세다.

역시 내 취향에는 상수동 벚꽃이다. 나즈막한 연립주택단지에 녹아든 풍경에선, 도로에 빽빽히 심겨진 여의도 벚꽃에서 느낄 수 없는 운치가 있다. 소담스러운 벚꽃을 올려다 보며 골목을 걸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커피발전소엘 왔다.

3월15일

수요일 낮 1시 38분. 현재 기온 영상 11도.

전에 살던 신길동 아파트 화단엔 목련이 있었다. 매일 아침 하윤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면서 목련 나무 아래서 봄이 얼마나 익었는지 가늠해 보았는데, 이사 후 처음으로 맞는 봄. 덕은동엔 목련이 어디 있는지 아직 찾지 못했다.

따뜻한 봄기운도 느끼고, 회복기에 접어든 다리도 살살 움직여 볼 겸 가회동으로 왔다. 바람엔 아직 찬 기운이 묻어있지만, 어깨 위에 떨어지는 햇살의 온기는 충분했다.

멀리 활짝 열린 풍문여고 교실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내 닫혀 있던 창만 보다가 활짝 열린 창을 보니 청량감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난 겨울도 무척 길었구나. 단골 가게도 사라져버린 화동, 삼청동, 가회동. 이젠 별로다,했었는데 막상 봄이 오니 또 좋다. 한번 다친 다리가 도지지 않을까, 조심해서 느릿느릿 걸었다.

감고당 길을 돌아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에 도착했다. 너무 조용해서 부담스럽지만 오늘은 여기서 버티기로 하고 노트북을 펼쳤다. 안셀 아담스의 책도 한 권 찾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20170315

 

언젠가 내 이럴 줄 알았지

20170224

몸의 방향을 돌려 뛰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왼쪽 종아리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고, 그대로 농구코트에 엎어졌다.

처음엔 누가 내 다리를 걷어찬 줄로 알았다. 그런데 아무도 나와 부딪힌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종아리 근육이 파열됐다.

누운 채로 사지를 붙들려 코트밖으로 질질 끌려나왔다. 혼자 다치는게 큰 부상이라던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겨우 조금 농구가 되려던 참이었고, 몇 년 만에 다시 치게 된 탁구도 갈 길이 멀다. 또 자전거 시즌이 코앞이다.

그러나 제일 먼저 생각났던 건 하윤이 입학식이었다.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목발을 짚고 가긴 싫었다. 빡빡이 머리 때문에 친구들에게 아빠가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신경 쓰는 판에 다리도 성치 않은 상태로 입학식에 간다니. 매일 아침, 하윤이 손을 잡고 학교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는데 모든게 꼬여버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격한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 언젠가 다칠 줄은 각오하고 있었는데, 정작 부상을 당하니 조금만 자제할 걸 싶었다.

수업시간에 과학 선생님과 극한의 말장난을 벌이다 결국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까불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겨울, 마지막

20170215.jpg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이 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들으면서 쓰고 있다. 미세하게 출렁거리며 돌아가는 턴테이블, 카트리지를 응시하며 소리로 변환되는 음악을 따라갔다.

큰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다. 화창한 날은 아니었지만, 비로소 겨울의 마지막 챕터에 이르렀는지, 회색빛 햇살에도 봄 기운이 묻어있었다.

지난 겨울은 분주했고, 동시에 무기력했다. 삼 월이 오면 나도 움을 틔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