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을, 여전히 가을

‘이번 비가 내리면 곧 겨울이겠군. ‘
‘아, 내일부터 추워진다니 이제 가을은 끝나겠구나.’

금방이라도 가을이 끝날것 같이 조바심을 냈지만, 가을은 여전히 곁에 머물고 있다. 퇴사한다고 환송회까지 열어줬는데,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바람에 서로 어색해하는 직장동료가 된 심정이다.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에도 아직 은행잎은 무사히 나뭇가지를 지키고 있다. 무성했던 숱이 줄어든 대신, 노란 잎사귀가 좀 더 짙어졌을 뿐이다.

몇해 전부터 시작된 겨울 무기력증은 거의 법칙으로 굳어졌다. 오늘 아침도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판돈 떨어지기전에 화투판에서 손털고 일어나기 만큼 힘들었다. (아, 나는 간이 작아 도박을 하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노화를 겪은 40대 중년 형님들에게 물어봤더니, 서로 짠 것처럼 동시에 ‘혹시, 암이 아니냐’는 서늘한 진단을 하도 해맑게 웃으면서 이야기해주는 바람에, 나 역시 웃으며 화답할 수 밖에 없었다.

“거, 그럴 수도 있겠네요. 허허. 참.”

이 형님들, 뭔가 감추는 눈빛이다. 분명 노화의 세계는 이게 다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가을이다,하는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살았다.

노화 리포트, 신체와 감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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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다시 추워졌다.

경기는 장기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전에 없던 유가 하락으로 북해산 브렌트유가 배럴당 50달러까지 내려앉아도, 삼한사온의 패턴만큼은 불변의 진리임을 증명하려는 듯 시베리아 고기압이 북촌까지 날아와 야무지게 내 뺨을 때리고 있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서 몸이 변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더위를 많이 타지만, 겨울엔 끄떡없는 ‘화끈한 싸나이’ 스타일이었는데, 이젠 겨울에 한기를 많이 느끼는 ‘아줌마’ 타입으로 진화하고 있다. (살이쪄서 그런지 가슴도 좀 나온 것 같다)

대신 여름이면 맥을 못 추던 몸뚱이가, 이젠 한여름 무더위에도 곧잘 버티게 되었다.

관절은 또 어떻고.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 버스 카드를 찍으려고 어깨를 올리다가 그만,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다행히 칠 년의 결혼생활로 다져진 인내심으로 버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달리는 150번 간선버스에서 변태로 몰릴 뻔한, 무척 아찔한 순간이었다.

‘혹시 오십견인가’ 하다가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이르다…라고 안심하려는 순간! 또래에 비해 탈모 얼리어답터였던 나로서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오십견이 벌써 찾아온대도, ‘거참, 한결같으십니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수 밖에.

그뿐 아니다.

난데없이 귀 (정확히는 ‘이주’) 안쪽에도 털이 나기 시작했다. 가끔 TV에서 하일성 해설위원의 모습을 보면, 12년근 장뇌삼 마냥 귀털이 주욱 삐져나온 것이 굉장히 신기했었는데, 내가 딱 그 꼴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언젠가부터 우리 아버지도 귀털을 자르고 계시더라.

어렸을 때는 코털이 삐져나온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 코털은 기본에, 귀털까지 손질해야 할 판이다. 하일성 해설위원과 우리 아버지만이 참으로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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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웨이의 겨털보다 더 임팩트 있게 귀털을 기르시는 하일성 위원님.

몸의 변화가 눈에 잘 띄어서 그렇지,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은 신체뿐이 아니다.

점점 기쁨에는 둔해지고 슬픔에는 예민해지고 있다. 하윤이와 놀고 있을 때가 아니면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아주 벅차도록 기뻐한 적이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특별히 기쁘거나 감격할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조금씩 ‘기쁨’이라는 감정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대신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조명하는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점점 나빠지고 있는 사회의 징후들, 눈물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인내의 시간을 떠올리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실제로 가슴이 묵직해진다.

아기일 때는 하루도 몇 번씩 울음을 터뜨리다가 어른이 되면서 눈물이 말라간다. 눈물이 많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아마 마음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어른은, 더구나 성인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에 충실하게 길들여져서 그런 탓이 클 것이다.

가끔씩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나도 여전히 슬픈 대목에선 마른 눈가로 버티기 힘들어한다. 한때는 나이가 들면 감정이 풍부해진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껏 켜켜이 쌓아온 슬픔과 눈물의 무게에 그만, 감정의 괄약근이 풀려버려서 그렇게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