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부커상에 슬쩍 묻어가는 책 이야기, 인생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한다.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던데, 솔직히 난 이런 상이 있는지도 몰랐다. 맨부커, 맨부커… 왜 이 글자를 볼 때 마다 부시맨이 연상되는가.

아무튼, 나만 이 권위 있는 상을 몰랐던 건지, 매체에서는 연일 호들갑을 떨며 맨부커상 소식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병맛 같은 기사는 ‘K팝에 이은 K문학의 쾌거…’ 뭐 이런 것들이었다. 해외 유명 배우와 인터뷰만 했다 하면, 마지막엔 반드시 “싸람해요, 욘이에가쥥계”로 끝마쳐야 직성이 불리던 연예가중계 PD를 보는듯 한 심경이었다.

맷데이먼.jpg
맷 데이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사랑해요, 연예가중계”

고은 선생을 노벨상 유력후보로 꼽으며 설레발을 치는 것도 그렇다. 해마다 발표를 앞두고 기자들이 집 앞까지 찾아가서 진을 치고 호들갑을 떤다고 하니, 노 시인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내 이번에는 기필코 노벨상 받아오마” 하며 출사표를 던진 것도 아닌데.

개인의 성공은 우리 모두의 성공으로,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니 탓’으로 돌리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여, 나는 아무도 내 성공에 숟가락 얹지 못하도록, 삼십구 년째 아무런 성공을 이루지 않고 있는데, 이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내후년쯤이면 ‘맨백수상’을 수여할 기세다.

어쨌거나 <채식주의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번 맨부커상 수상의 여파로 당분간 도서관에서 한강의 책을 빌려보기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문학상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소설 이야기를 좀 더 찌끄려 보자.

최근에 읽은 소설은 중국 작가 위화의 <인생>이었다. 뼛속까지 염세주의에 중증 비관주의자인 내 얘기를 듣더니 요한이형이 선물로 준 책이자, 일종의 처방전 같은 거였다.

아…이거 영화로 봤던 건데, 하면서 다소 심드렁하게 책장을 열었지만, 처음 접하는 이야기처럼 후루룩 재미있게 읽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살기 힘들다고 열두 살짜리 딸 펑샤를 남의 집에 보내버린다거나, 어린 유칭에게 시도 때도 없이 손찌검을 일삼는 대목에서는 푸구이를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압축적이어서 읽기에도 무척 좋았다.

푸구이
푸구이, 이 자식 @ 영화 <인생>

책을 볼 때 보통은 빨리 스토리로 들어가려고 추천사나 서문은 건너뛰는 편인데, 이번엔 이미 영화로 봤겠다 급할 거 있나,하는 심정으로 첫 장부터 찬찬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장을 얼마 넘기지도 못하고 나는 그만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필력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한국어판 서문.
서문.

서문 3연타 콤보. 나는 일찍이 이런 서문의 향연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어판 서문과 일반 서문이 나란히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판 개정판을 내놓았다고 서문을 덧붙이고, 게다가 기존에 있던 한국어판 서문도 빼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다니.

나는 이쯤에서 위화는 말하기를 무척 즐기는 사람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자신의 소설로 말을 걸어오는 것도 성에 안 차, 개정판 서문까지 공들여 써가며 야부리를 날리는 작가는 흔치 않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 작가가 된 그였지만, 실은 깊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가엾은 밀리언셀러 작가.

하여, 나는 자칫 유명 작가가 되어 외로워지지 않도록, 삼 년째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이 블로그에다 글을 찌끄리고 있는데, 이 전략 역시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글쓰기 의욕이 맹렬한 기세로 사그라들고 있다.

그나저나 요한이 형은 대체 왜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걸까. 푸구이의 가족사가 하도 기구해서, <인생>을 읽은 뒤로 그나마 없던 삶의 욕망이 39그램 정도 더 줄어 버린 것 같다.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인생>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혼이 담긴 구라, 최민석 작가

요즘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로 문학계가 시끄러운가 보다.

처음엔 표절을 부인하다가, 나중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참신한 변명을 선보이며 사실상 표절임을 인정하고 말았다.

확실히 소설가는 영민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나도 이번 사건을 접하며 느낀점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비공개나 마찬가지인 이 블로그가 훗날 유명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밝혀둘것이 있다.

내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OOO만에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사실…내가 좋아하는 최민석 작가의 오마쥬다.

다시 말하지만, 표절이 아니다. 분명히 오마쥬다.

근데 오마쥬도 한두 번이지, 자꾸 써먹다보니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이제는 마치 내 것인냥 자꾸 쓰게 되고 말았다.(최작가님 미안합니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내 절제력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표절을 안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베낀 사람은 없다’고 결론 내리기로 했다.

아무튼 정작 당사자인 최민석작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다.

최민석작가를 처음 만난건 상수동 커피발전소에서였다. (조그만 카페지만 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아마 서울시내 카페중에 단위 면적당 작가 비율이 최고이지 않을까)

오전 시간대에 마주치는 임경선 작가와는 인사 정도는 주고 받지만, 주로 오후에 나타나는 최민석작가는 그냥 익살스러운 표정을 가진 파마머리의 사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언젠가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서야(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고, 카페가 작아서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 저냥반 소설가 인가보다’하고 알게된 정도였다.

최민석작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최민석작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순전히 호기심으로 최민석 작가의 작품에 손을 댔다가, 그의 나머지 책들까지 모조리 읽고도 부족해서, 블로그까지 샅샅이 정독하게 되었다.

작가의 지난 인터뷰를 보면 B급 문학, 막장 소설이라고 자신을 낮췄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가벼움(?)에 매력을 느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같은 작품은, 읽기도 전에 압도적인 분량에 오금이 저려오는데다가, 게다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쓰는 바람에 ‘아, 문학이란 참으로 엄숙한 것이로구나’하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최민석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 이게 뭐야? 이렇게 대충써도 되는거야?’라고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막쓴 것은 아니지만(다시 말하지만 소설가들은 영민하다), 그의 글은 읽기 쉽고, 재밌다 못해 독자로 하여금 ‘이 정도라면 나도 쓰겠는데?’하고 얕잡아 보게하여, 결국 진짜로 글을 쓰게 만드는 매력이있다.

특히나 최근 작인 <풍의 역사>는 평경장이 말했던 ‘혼이 담긴 구라’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실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해서 너는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혼이 담긴 구라! 으응? 응!
이쯤해서 너는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혼이 담긴 구라! 으응? 응! / 영화 <타짜>

나는 오늘 하루도 좀더 창의적인 구라를 뱉어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하루종일 혼자 일하니 뻥을 칠 기회도 거의 없다, 최작가님에게 남기는 메시지로 이 글을 허겁지겁 마무리한다.

최민석작가님, 사…사….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