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없이 맞은 월요일, 카페 창비

금,토,일

올해는 성탄절이 금요일에 들어앉은 덕분에, 졸지에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연휴’라고 하니 꽤나 서구적인 느낌이 들지만, 실상 2016년을 코앞에 둔 대한민국은 역사를 어디까지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지 증명해보이는 실험장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민초들은 나라와 민족의 앞날보다는, 눈 앞에 이익에 민감한 법이다. 나 역시 신길 6동 대표 소인배 답게, 며칠 후 강림할 New year 연휴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매년 그랬다. 크리스마스부터 신년 사이에 끼인 며칠은 살아낸다기 보다는 흘려보내는 기분이었다. 온 국민이 합심하여 남은 삼사 일을 대충 떼우다가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다짐으로 사이좋게 게으름을 부리는 느낌이다.

카페 창비에 왔다.

카페는 넓직하고 여유로웠다. 책을 읽기도, 작업을 하기도 좋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초 역세권. 역시 출판계의 ‘있는 집’은 다르다고, 망원동 박씨의 말이었다.

최근 규칙적인 농구 생활로 허리가 불편해서, 반쯤 서서 앉을 수 있는 높다란 의자가 있는 자리를 골랐다. (농구는 열심히 할 수록 건강을 좀먹는 운동이다) 테이블 밑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엔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콘센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창비. 카페는 맘에 들었지만… 신경숙 표절사건에 의도적인 베껴쓰기로 단정 못한다,던 편집자의 어이없는 변명이 떠올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불의한 출판권력에 대항하는 의미로, 커피 한잔만 시켜 놓고 하루종일 버텼다. 다음에 올때는 충전기도 가져올 요량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스타벅스에 가면 거대자본을 대항하는 의미로, 단골 카페에 가면 사장님이 좋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버티게 된다. 읭? 적어 놓고 보니 맥락이 전혀 없다.

실은 그저 카페 죽돌이일 뿐임을 겸허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허기가 져서, 커피 한잔으로 버티겠노라는 투쟁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코코넛 단팥빵을 하나 시켜먹었다.

느끼했다. 변졀자의 최후였다.

혼이 담긴 구라, 최민석 작가

요즘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로 문학계가 시끄러운가 보다.

처음엔 표절을 부인하다가, 나중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은 기억은 없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참신한 변명을 선보이며 사실상 표절임을 인정하고 말았다.

확실히 소설가는 영민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나도 이번 사건을 접하며 느낀점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비공개나 마찬가지인 이 블로그가 훗날 유명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밝혀둘것이 있다.

내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OOO만에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사실…내가 좋아하는 최민석 작가의 오마쥬다.

다시 말하지만, 표절이 아니다. 분명히 오마쥬다.

근데 오마쥬도 한두 번이지, 자꾸 써먹다보니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이제는 마치 내 것인냥 자꾸 쓰게 되고 말았다.(최작가님 미안합니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내 절제력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표절을 안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베낀 사람은 없다’고 결론 내리기로 했다.

아무튼 정작 당사자인 최민석작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다.

최민석작가를 처음 만난건 상수동 커피발전소에서였다. (조그만 카페지만 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아마 서울시내 카페중에 단위 면적당 작가 비율이 최고이지 않을까)

오전 시간대에 마주치는 임경선 작가와는 인사 정도는 주고 받지만, 주로 오후에 나타나는 최민석작가는 그냥 익살스러운 표정을 가진 파마머리의 사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언젠가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서야(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고, 카페가 작아서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 저냥반 소설가 인가보다’하고 알게된 정도였다.

최민석작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최민석작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순전히 호기심으로 최민석 작가의 작품에 손을 댔다가, 그의 나머지 책들까지 모조리 읽고도 부족해서, 블로그까지 샅샅이 정독하게 되었다.

작가의 지난 인터뷰를 보면 B급 문학, 막장 소설이라고 자신을 낮췄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가벼움(?)에 매력을 느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같은 작품은, 읽기도 전에 압도적인 분량에 오금이 저려오는데다가, 게다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쓰는 바람에 ‘아, 문학이란 참으로 엄숙한 것이로구나’하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최민석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 이게 뭐야? 이렇게 대충써도 되는거야?’라고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막쓴 것은 아니지만(다시 말하지만 소설가들은 영민하다), 그의 글은 읽기 쉽고, 재밌다 못해 독자로 하여금 ‘이 정도라면 나도 쓰겠는데?’하고 얕잡아 보게하여, 결국 진짜로 글을 쓰게 만드는 매력이있다.

특히나 최근 작인 <풍의 역사>는 평경장이 말했던 ‘혼이 담긴 구라’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실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해서 너는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혼이 담긴 구라! 으응? 응!
이쯤해서 너는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혼이 담긴 구라! 으응? 응! / 영화 <타짜>

나는 오늘 하루도 좀더 창의적인 구라를 뱉어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하루종일 혼자 일하니 뻥을 칠 기회도 거의 없다, 최작가님에게 남기는 메시지로 이 글을 허겁지겁 마무리한다.

최민석작가님, 사…사….좋아합니다.